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지카타 토시조 (문단 편집) === 사망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210920_003244.jpg|width=100%]]}}} || || {{{#ffffff ''' 히지카타 토시조의 마지막 전투 당시 지도''' }}} || 보신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하코다테 전쟁]] 동안, 히지카타는 1869년 6월 14일 (음력 5월 5일) [[시동]] 이치무라 데츠노스케[* 시동으로 이치무라 테츠노스케를 두고 있었는데, 이 사실을 채용한 작품이 소설 타올라라 검과 만화 [[피스메이커 쿠로가네]]. 이치무라는 [[1873년]]에 병사했다고 전해진다.]를 여관의 개인 방으로 불러들였다. 그곳에서, 그는 이치무라에게 [[사세구]], 그의 일본도, 편지, [[https://m.youtube.com/watch?v=s5p2oqyHHKQ&feature=youtu.be|자신의 사진]], 그리고 그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맡겼다. 이치무라는 히노에 있는 히지카타의 처남 사토 히코고로의 집에 그것들을 가져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치무라는 전쟁을 뚫고 편지나 사진 등을 사토에게 전달했다. 편지에는 시동 이치무라를 부탁한다는 히지카타의 걱정이 담긴 편지도 있었다고 한다. 이치무라에게 맡겨진 사세구는 다음과 같다. >설사 이 몸이 북쪽 에조(蝦夷:홋카이도)섬 땅끝에서 썩을지라도, 내 혼만은 저 동쪽의 주군을 지키리. >たとひ身は 蝦夷の島根に 朽ちるとも 魂は東の 君やまもらん 혁명의 마지막 전투에서, 1869년 6월 20일(음력 5월 11일) 신정부군의 [[하코다테]] 총공격이 시작된다. 신정부군은 구막부군을 곳곳에서 격파하고 마침내 하코다테를 포위한다. 그리고 신정부군은 하코다테를 향해 총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당시 신정부군의 총병력이 1만에 가까운 대군에 비해 하코다테군은 3,000명도 안되는 소수였다. 또 신정부군은 하코다테 산에 기습공격을 실시하여 하코다테 시가지를 순식간에 점령했다. 이 때, 고립된 벤텐다이바에는 [[시마다 카이]] 등 신센구미의 생존자들이 농성하고 있었다. 나나에하마에서 막부군이 밀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히지카타는 소수의 군사를 이끌고 구원에 나서 신정부군을 물리친다. 그 때 아군 군함이 신정부군함 '아사히마루(朝陽丸)'를 격침하는 광경이 잇폰기 관문에서 지휘하는 히지카타의 눈에 들어오게 된다. 히지카타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라고 판단해, 부관 오노 우나카(大野右仲)에게 말을 건다. >속히 군사를 일으켜라. 우리는 이 울타리에 올라가 물러나는 자를 베겠다. >速やかに兵を進めよ。我はこの柵にあって、退く者を斬る[[https://mag.japaaan.com/archives/158842/3|#]] 오노는 패주하는 아군을 이끌고 전진한다. 패주하는 하코다테 군은 순식간에 기세를 되찾아 갔다. 히지카타는 홀로 적지로 뛰어든다. 당시 상황은 막부군의 최후의 보루 고료카쿠도 항복할 기미가 짙어진 상황이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Land_And_Naval_Battle_of_Hakodate-1024x512.jpg|width=100%]]}}} || || {{{#ffffff ''' 잇폰기 관문에서의 히지카타 토시조 (가운데)[* 그림 이름은 '箱館大戦争之図'[[https://hakohaku-archives.c.fun.ac.jp/records/S57-0080|#]]]''' }}} || 히지카타는 패배당하는 동료들을 이끌고 진군시켜 잇폰기 관문을 수비하며 "'''우리들의 법도에 따라 도망가는 자는 벤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말 위에서부터 칼을 휘두르며 지휘하는 모습이 너무 눈에 띄었다. 난전 중에 총탄이 복부를 관통하여 낙마, 측근이 급히 다가왔을 때는 히지카타 토시조는 벌써 절명했다고 전해진다. 향년 34세. 적의 총탄이 아닌 쏟아지는 탄에 맞았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항복에 완강히 반대하는 토시조를 제거하기 위해 아군의 손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결국 히지카타 토시조의 죽음으로 [[나가쿠라 신파치]]와 [[사이토 하지메]]를 제외한 신센구미의 모든 주요 인물이 사망하게 되었다. 3일 후인 1869년 6월 23일(음력 5월 14일) 마지막 지휘관 소마 가즈에(相馬主計) 휘하의 생존한 신센구미 일당이 벤텐 다이바에서 항복했다. 그가 죽은 지 1주일 후, [[고료카쿠]] 성이 함락되었고, 1869년 6월 27일 [[에조 공화국]]이 [[메이지]] 신정부에 항복하여 [[보신 전쟁]]이 종결되었다. 히지카타가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시신은 고료카쿠, 헤케쓰히, 간조지에 묻힌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토시조 묘.jpg|width=100%]]}}} || || {{{#ffffff ''' 그의 고향 히노시에 있는 묘소''' }}} || 그의 시신은 후에 정원지기 출신의 코시바 초노스케(小芝長之助)가 유해를 받으러 갔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코시바는 [[다이쇼 시대]]가 되어 히노시에 있는 히지카타의 생가를 방문했다. 당시의 코시바는 "고료카쿠안의 어딘가에 묻었다."라고만 말했다고 한다. 코시바의 두루뭉술한 대답에 의문을 느낀 사람들은 히지카타 토시조 생존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러시아]]로 망명갔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는 설일뿐이다.][* 이 생존설을 채택한 가장 유명한 작품이 [[골든 카무이]]다.] 히지카타의 무덤의 위치는 "이바 하치로 군의 무덤은 하코다테 고료카쿠, 히지카타 토시조 씨의 무덤 옆에 있다"라고 사담회 기록에 있다. 이바 하치로의 무덤도 고료카쿠 안의 어딘가에 있는것으로 추정하지만, 히지카타와 마찬가지로 확실하지 않다. 히지카타 토시조는 에도의 천연이심류 시위관 도장시절부터 교토의 신센구미, 도바-후시미 전투부터 일본을 거슬러 혼슈 북단 하코다테 전투까지 신센구미를 지켰다. '''사실상 신센구미의 처음과 끝을 지킨 인물이자, 하코다테를 대표할 만한 인물 중 한 명이다.''' 심지어 하코다테시의 준 마스코트 중 하나로도 등장하고 있다. 고향인 히노시도 마찬가지. 막부군과 오우에츠 열번 동맹의 군사 고문을 담당하고, 에조까지 올라가 막부군의 손을 끝까지 잡아 주었던 프랑스군 교관 쥘 브뤼네(Jules Brunet)[*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 등장하는 [[네이선 알그렌]]의 모델로 알려져 있다.]는 "그가 유럽에 갔으면 장군이 되었을 것"이라 평하기도 하였다. 이즈 지방의 대관(代官)인 에가와 타로자에몽[* 에가와는 당시에는 제일의 개명가로 반사로 제조와 농병대 편성에도 관여했던 인물이다.](江川太郎左衛門)은 "호매불굴, 담기 비상한 사나이(豪邁不屈、胆気非常の男)[[https://www.excite.co.jp/news/article/Japaaan_158842/?p=7|#]]"라고 평했다. 히지카타 토시조의 결점으로는 역시 신센구미 시절 곤도와 함께 다수의 [[동지]]들을 숙청하고 잔인하게 살해한 행위다. 이 행동들이 조직의 방어라고는 하나 매우 지나쳤고 권력욕을 보였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하지만 그는 신센구미 괴멸 후에도 보신 전쟁에 참전해 무사로서의 자세를 보이며 활약했고, 나약해진 다이묘와 무사들이 무조건적으로 항복하는 가운데 마지막까지 가장 무사답게 투쟁해 막부의 유종의 미를 거둔 '좌막파(막부보좌파)의 [[영웅]]'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도 받고 있다. 상당히 복합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라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